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임신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
작성자 관리자 날짜 2012-09-24 조회수 2470

당신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동안 새벽에 몇 번이고 당신의 배에 내 귀를 대어보았습니다.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 했습니다. 아마도 나는 앞으로 몇 개월은 당신 몰래 이렇게 배에 귀를 대겠죠. 당신은 잠결에 아랫배에서 내 귀의 온기를 느끼는지 잠시 뒤척입니다. 아마도 나는 밤마다 몰래 당신의 아랫배에 가장 오랫동안 귀를 대어보는 사내가 되어갈 것 같습니다. 이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도 되겠죠. 삶이 남기는 다양한 비밀은 저마다의 시차를 갖고 있다고 믿으며, 때론 그 시차를 내 언어로 길들이고 때론 다른 시차 속으로 비우고자 하는 게 내 시의 세계였는데, 당신의 아랫배에 존재하는 우리가 만들어준 세계에 대해 나는 다시금 새로운 시차를 느낍니다. 아이와 나는 지금 서로 다른 시차를 갖고 있겠죠. 아이의 심장 소리가 지금 내 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시차라서 행복합니다. 그 사실이 언젠간 잊힐 것이고 먼 훗날 나는 늙어 그게 서러워서 당신의 아랫배에 귀를 기울여보던 이 순간의 내 귀를 만져볼 날도 오겠죠.

당신은 지금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습니다. 당신의 몸 안에는 당신의 심장도 있고 아이의 심장도 뛰고 있습니다. 한 몸에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당신의 몸은 매일 어떤 상상으로 움직일까요? 당신은 앞으로 9개월을 두 개의 심장으로 살아갈 텐데…. 내 쪽에서 서툴게 짐작해보면 산모의 예민하고 섬세한 반응들은 아마도 두 개의 심장으로 지내는 동안 생기는 몸의 새로운 상상력이 아닐까요? 당신의 몸은 두 개의 심장이 나누는 대화일 것입니다. 사내인 나는 그 대화를 엿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. 앞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황홀한 경이와 때로는 두서없이 나타날 불안의 감정들 또한 두 개의 심장이 보여주는 태동이라 생각됩니다. 두 개의 심장이 나누는 그 태동은 불현듯 우리 앞의 삶이 되어 나타나겠지요. 당신, 나는 그 태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. 가끔 당신의 아랫배에 귀를 대고 있으면 당신의 심장 소리인지 아이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하기 힘든 심장 소리가 들려옵니다. 내가 모르는 작고 미미한 그 세계는 아기집이라고 하더군요. 당신의 몸속에서 아이는 수시로 자신의 심장과 당신의 심장을 오고가며 숨을 쉬고 있겠지요. 나는 당신의 아랫배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일까요? 당신의 배 속에서 오래전 내 태동을 듣는 듯한 꿈도 꾸어봅니다.

새벽이 되면 아이의 심장 소리가 좀 더 잘 들리지 않을까, 하는 나의 천진한 호기심도 한몫했지만 아직은 무척이나 심장의 크기가 작아 그 소리가 내게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. 당신은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그날 밤 어떤 산모 일기를 썼을지 궁금합니다. 요즘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아이의 심장 음원 파일을 들으며 경이에 가득 찬 생각들을 떠올리곤 해요.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요즘 신체에 관련된 한 권의 책을 준비 중입니다.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작업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겁니다. 그 책의 마무리를 올해는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실은 진행이 더딥니다. 갑작스레 우리 삶에 나타난 아이도 분명 큰 이유겠지요.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이 책의 덜미를 붙잡던 중 나는 며칠 전 우리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새로운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.

당신, 정말이지 나는 인간은 모두 태내에 있는 동안 두 개의 심장으로 지내는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를 품었습니다. 자신이 머물고 있는 몸이 엄마의 몸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모두 자궁에 있는 동안 한 몸속에서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숭고에 가깝습니다. 오늘 밤은 당신이 아이의 몸 안으로 들어가 아이의 태내에서 팔다리를 구부린 채 잠들어 있는 듯합니다. 두 개의 심장은 자리를 바꾸어도 숨소리는 같습니다. 아이의 숨소리를 내쉬며 당신은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.